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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소금 장수 을불
제16화

소금 장수 을불

고구려 미천왕 · 3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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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고국천왕은 농사짓던 을파소를 국상으로 삼았고, 194년 흉년이 들자 봄에 나라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걷이가 끝나면 거두어들이는 법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백 년쯤 뒤, 고구려에 의심 많은 왕이 즉위했다.

등장인물

을불봉상왕의 조카.
이 이야기의 주인공
봉상왕고구려의 왕.
의심이 많다
음모수실촌 사람.
을불을 머슴으로 부린다
재모동촌 사람.
을불과 소금 장사를 한다
노파사수촌 사람.
을불의 소금을 탐낸다
창조리고구려의 국상.
왕에게 바른말을 한다

292년, 고구려의 새 왕 봉상왕은 작은아버지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공이 크고 백성이 우러러본다는 것이 까닭이었다.

봉상왕고구려의 왕
백성안국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숙신의 난리를 어찌 면했겠소…
돌고봉상왕의 아우을불돌고의 아들
돌고왕께서 나를 의심하신다.
가거라, 을불아.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293년 가을, 왕은 아우 돌고가 딴마음을 품었다며 죽음을 내렸다.

을불아버지…

을불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들로 달아났다. 사람들은 죄 없이 죽은 돌고를 슬퍼했다.

을불은 수실촌 사람 음모의 머슴이 되었다.

음모수실촌 사람
음모어디서 굴러왔는지는 묻지 않으마.
대신 밥값은 곱절로 해라.

음모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음모개구리 소리에
잠을 못 자겠다!
밤새 돌을 던져서라도
못 울게 해라!

집 곁의 늪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을불에게 밤에 기와 조각과 돌을 던져 울음을 그치게 했다.

돌고어떻게든 살아남아라.

개구리 소리가 그치면, 늪가에는 을불 혼자 남았다.

음모쉬긴 누가 쉬어!
한 짐 더 해 와라!

낮에는 나무를 해 오게 하며,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고된 일을 견디다 못한 을불은, 한 해 만에 그 집을 떠났다.

그 뒤 을불은 동촌 사람 재모를 만나, 함께 소금 장사를 했다.

재모자네, 소금 장사 해 볼 텐가?

두 사람은 배에 소금을 싣고, 강을 따라 압록에 이르렀다.

을불강바람이 시원하구려.
재모소금 장수한테 강은 길이고,
바람은 밥일세.

을불은 강 동쪽 사수촌의 한 집에 묵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청하자, 한 말쯤 덜어 주었다.

노파그 집 주인
노파조금만 더 주구려.
을불팔아야 할 소금이라,
더는 못 드리오.

앙심을 품은 노파는 몰래 자기 신발 한 짝을 을불의 소금 자루 속에 넣었다.

노파는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난 을불을 쫓아와, 신발을 감췄다고 우겼다.

노파도둑이야!
내 신발을 훔쳐 갔소!
을불무, 무슨 말씀이오?

노파는 을불을 고을 관리에게 고발했다.

압록재압록의 고을 관리
압록재소금은 노파에게!
이놈은 매를 쳐 내쫓아라!

압록재는 소금을 신발 값으로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매를 쳐서 내쫓았다.

돌고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얼굴은 바싹 마르고 옷은 누더기가 된 그를, 왕의 손자로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98년 가을,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죽여 백성이 굶주렸다.

그런데도 봉상왕은 궁궐을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그리고 사람을 풀어,
을불을 찾아 죽이게 했다.

왕의 군사돌고의 아들 을불을 찾는다!
본 자는 없느냐!
…웬 거지 소금 장수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왕의 사람들은 끝내 을불을 찾지 못했다.

300년, 봄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큰 흉년이었다.

8월, 왕은 나라 안의 열다섯 살 이상 남녀를 모두 불러냈다.

궁궐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먹을 것도 없이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은, 하나둘 고향을 버리고 떠돌았다.

감독더 세게 당겨라!
해 지기 전에 기둥을 세워야 한다!

하늘의 재앙이 잇따르자, 국상 창조리가 왕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창조리국상 (나라의 으뜸 벼슬)
창조리굶주린 백성에게 나무와 돌을 지우시니,
백성의 부모 된 뜻이 아닙니다.
봉상왕궁궐이 웅장하지 않으면
임금의 위엄이 서지 않소!
창조리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음은 어짊이 아니요,
신하가 간하지 않음은 충성이 아닙니다.
봉상왕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 싶은 게요?

창조리는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하기로 뜻을 모았다.

조불북부 사람소우동부 사람

그리고 먼저 북부의 조불과 동부의 소우를 보내, 산과 들을 뒤져 을불을 찾게 했다.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배 위의 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소우저 사람이다…!

몹시 여위었지만, 몸가짐이 예사롭지 않았다.

소우지금 임금이 무도하여,
신하들이 몰래 폐하려 합니다.
왕손께서 검소하고 어지시다 하여,
모시러 왔습니다.
을불나는 들사람이오.
왕손이 아니오.
다시 잘 알아보시오.
소우임금은 이미 민심을 잃었습니다.
신하들이 왕손을 기다립니다.
의심하지 마소서.

을불은 마침내 그들을 따라나섰다. 창조리는 기뻐하며, 아무도 모르게 그를 숨겨 두었다.

300년 가을 9월, 봉상왕이 후산 북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국상 창조리도 왕을 따랐다.

창조리나와 마음이 같은 이는,
나를 따라 하시오.

창조리는 갈댓잎 하나를 꺾어, 자기 관에 꽂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갈댓잎을 꽂았다. 모두의 마음이 같았다.

창조리는 모두의 마음이 같음을 알고, 마침내 왕을 폐했다.

봉상왕무엄하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왕은 별실에 갇혔고, 군사들이 그 둘레를 지켰다.

갇힌 봉상왕은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아들도 함께 죽었다.

신하들은 왕손 을불을 맞아들여 옥새를 바쳤다.

고구려의 열다섯 번째 왕, 미천왕이 즉위했다.

돌고어떻게든 살아남아라.

개구리 우는 늪에 돌을 던지고, 소금 자루를 지던 손이 이제 옥새를 쥐었다.

압록강대동강고구려모용부(선비족)요동서해동해국내성지금의 중국 지안현도군302년서안평311년낙랑군313년대방군314년연도는 『삼국사기』 · 위치는 대략(추정)

왕이 된 을불은 고구려를 둘러싼 중국 군현들을 차례로 쳤다. 302년에는 현도군을 쳐서 8천 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고구려군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을 빼앗았다.

재모강은 길이고, 바람은 밥일세.
미천왕이 강은 이제
고구려의 길이다.

서안평은 요동에서 낙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313년 겨울 10월, 미천왕은 낙랑군을 쳤다.

고구려군은 낙랑의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무너진 자리에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

그로부터 420여 년.

낙랑군은 마침내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이듬해인 314년, 고구려는 남쪽의 대방군도 쳤다.

음모개구리 소리에 잠을 못 자겠다!
시종전하, 개구리를
쫓을까요?
미천왕…두어라.
울게 두어라.

왕은 오래도록,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331년 봄 2월, 미천왕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왕을 미천의 들(미천원)에 묻고, ‘미천왕’이라 불렀다.

296년, 서쪽 선비족의 모용외가 쳐들어와 왕의 할아버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려 한 일이 있었다.

무덤 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 그들은 겁을 먹고 물러갔다고 한다.

왕이 세상을 떠나고 11년 뒤,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대군이 고구려로 쳐들어온다.

342년 겨울,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진다.

제16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삼국사기』가 전하는 을불의 떠돌이 시절

    을불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편 첫머리에 실려 있어요. 아버지 돌고가 죽자 을불은 들로 달아나 수실촌 음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어요. 밤에는 늪의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고, 낮에는 나무를 하느라 쉬지 못하다가 한 해 만에 떠났지요. 그 뒤 동촌 사람 재모와 소금 장사를 하다가 사수촌 노파의 꾀에 걸려 매를 맞았고, 사람들은 여위고 남루한 그를 왕손으로 알아보지 못했대요. 품을 파는 머슴, 배로 다니는 소금 장수, 고을 관리 ‘재(宰)’까지, 3세기 고구려 사람들의 살림을 엿보게 해 주는 기록이에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2. 봉상왕과 창조리

    봉상왕은 292년 작은아버지 안국군 달가를, 293년 아우 돌고를 의심해 죽였어요. 298년 서리와 우박으로 백성이 굶주릴 때 궁궐을 늘려 지었고, 300년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가물어 굶주림이 극심했는데도 열다섯 살 이상 남녀를 모두 불러 궁궐을 고치게 했어요. 국상 창조리가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어짊이 아니고, 신하가 간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니다’라며 말렸지만 왕은 비웃었지요. 그해 9월 후산 북쪽 사냥터에서 창조리가 갈댓잎을 관에 꽂자 모두 따라 꽂았고, 신하들은 왕을 폐했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미천왕
  3. 무용총 벽화 「수렵도」무용총 벽화 「수렵도」 (중국 지안)

    고구려 사람들의 사냥

    고구려 사람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사냥하기를 즐겼어요. 사냥은 군사 훈련이자 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큰 행사여서, 『삼국사기』에도 왕이 사냥을 나간 기록이 자주 나와요. 중국 지안의 무용총 벽화 「수렵도」에는 말을 달리며 몸을 돌려 활을 쏘는 고구려 사람들이 그려져 있어요. 창조리가 왕을 몰아낼 때를 사냥터로 고른 것도, 많은 신하와 군사가 왕을 따라 한자리에 모이는 때였기 때문일 거예요.

    무용총 벽화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 소금과 강

    바다에서 얻는 소금은, 바다에서 먼 산골짜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면서도 귀한 물건이었어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에서 소금과 생선을 거두어 천 리 길을 져 나르게 했다고 전해요(12화). 을불은 재모와 함께 배에 소금을 싣고 압록에 이르렀고, 노파에게 소금을 한 말쯤 덜어 주었다가 더 주지 않아 앙심을 샀어요. 강을 따라 소금이 오가던 3세기 고구려의 모습이 이 짧은 이야기에 담겨 있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삼국지』 위서 동이전
  5. 서안평, 압록강 어귀의 길목

    서안평은 요동군에 딸린 고을로,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단둥 구련성 부근, 압록강 어귀에 있었던 것으로 봐요. 고구려는 146년 태조왕 때 이곳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고, 242년 동천왕 때도 공격했어요. 311년 미천왕이 마침내 서안평을 차지하자, 요동과 낙랑·대방 사이의 길이 끊겼다고 보는 학자가 많아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평양 석암리 9호분 금제 띠고리평양 석암리 9호분 금제 띠고리 · 국립중앙박물관

    낙랑군의 끝, 313년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낙랑군(6화)은 400년 넘게 이어졌어요. 『삼국사기』는 313년 10월 미천왕이 낙랑군을 쳐서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적었어요. 중국 역사책 『자치통감』은 그해 낙랑·대방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해마다 싸우던 장통이 백성 천여 집을 이끌고 모용외에게 가 버렸고, 모용외가 그들을 위해 낙랑군을 새로 두었다고 전해요. 낙랑군의 중심지는 평양 대동강 남쪽의 낙랑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 둘레의 무덤들에서는 이 금제 띠고리 같은 화려한 유물이 나왔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자치통감』
  7. 미천왕의 무덤과 상상으로 그린 장면

    미천왕은 331년 2월 세상을 떠나 ‘미천의 들(美川之原)’에 묻혔어요. 중국 지안의 서대묘(마선구 500호묘)를 미천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돌을 계단처럼 쌓은 큰 돌무지무덤인데, 가운데가 깊게 파헤쳐져 묘실이 사라져서 342년 전연이 무덤을 파헤친 일과 이어 보지요. 황해도 안악 3호분을 미천왕을 다시 묻은 무덤으로 보는 주장도 있어요. 한편 돌고의 마지막 당부, 나루에서 군사들과 마주친 일, 늙은 왕이 개구리 울음을 그냥 두게 한 장면은 기록에 없는, 상상으로 그린 장면이에요. 311년 서안평은 왕이 보낸 장수가 쳤는데, 이 화에서는 왕이 강어귀에 선 모습으로 그렸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서대묘 발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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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 쓰러진 왕, 다시 세운 나라

342년 겨울, 전연의 대군이 환도성을 덮쳤다. 홀로 말을 달려 달아난 고국원왕, 그리고 파헤쳐진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 쓰러진 아버지 고국원왕과,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운 아들 소수림왕의 이야기.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