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의 왕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백제 근초고왕은 369년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371년 평양성을 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쓰러뜨렸으며, 가지가 일곱 달린 칼 칠지도는 바다를 건너 왜로 갔다. 그 무렵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이 나라를 추슬렀고, 그 뒤를 이은 아우 고국양왕은 386년 아들 담덕을 태자로 세웠다.
등장인물
열여덟 살에 왕이 된다
관미성을 되찾으려 한다
아신의 숙부
아신왕의 외삼촌
414년,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 가까이에 사람 키의 세 배가 넘는 돌비석이 섰다.
장수왕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공을 새겨 세운 비석, 광개토대왕릉비다.
비석은 시조 추모왕(주몽)의 이야기로 시작해, 이렇게 이어진다.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二九登祚 號為永樂太王 — 광개토대왕릉비
391년,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담덕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해를 세는 이름(연호)을 ‘영락’이라 했다. 사람들은 그를 ‘영락태왕’이라 불렀다.
『삼국사기』는 그가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크고 활달했다고 적었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371년 평양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392년 7월, 담덕은 4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땅으로 내려갔다.
고구려 왕 담덕이 4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백제의 도읍 한성에 닿았다.
진사왕은 담덕이 군사를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했다.
석현성을 비롯한 열 곳 남짓한 성과 한강 북쪽의 여러 마을이, 고구려 손에 들어갔다.
9월, 담덕은 말머리를 돌려 북쪽의 거란을 쳤다.
거란 사람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다.
거란 땅에는 잡혀간 고구려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담덕은 그들을 불러 달래어,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10월, 고구려군은 바닷가의 관미성 앞에 이르렀다.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이고, 바닷물이 빙 둘러싼 성이었다.
왕은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성을 몰아쳤다.
공격은 스무 날 동안 이어졌다.
스무 날 만에, 관미성이 떨어졌다.
그 무렵, 진사왕은 도읍을 떠나 구원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왕은 열흘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진사왕은 구원의 행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진사왕의 뒤를 이어, 침류왕의 맏아들 아신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침류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신이 어려서, 숙부 진사가 먼저 왕이 되었다고 한다.
393년 정월, 아신왕은 외삼촌 진무를 좌장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맡겼다.
진무는 침착하고 굳세며 큰 꾀가 있어, 사람들이 잘 따랐다.
393년 8월, 아신왕은 진무를 불렀다.
진무는 1만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떠났다.
석현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
먼저 관미성을 에워쌌다.
진무는 몸소 군사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썼다.
성안의 고구려 군사들은 성을 굳게 지켰다.
그러나 군량을 나르는 길이 이어지지 못했다.
진무는 끝내 군사를 돌렸다. 관미성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깃발이 나부꼈다.
394년 7월, 백제군이 다시 북쪽으로 올라왔다.
담덕은 몸소 날랜 기병 5천을 이끌고 맞받아쳤다.
수곡성 아래에서 진 백제군은
밤을 틈타 달아났다.
8월, 고구려는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에 대비했다.
395년 2월, 서북쪽 하늘에 꼬리별이 나타났다가 스무 날 만에 사라졌다.
8월, 아신왕은 진무 등에게 다시 고구려를 치게 했다.
패수 가에는 고구려 왕 담덕이 몸소 7천 군사를 이끌고 진을 치고 있었다.
백제군은 크게 졌다.
죽은 이가 8천에 이르렀다.
11월, 아신왕은 패수의 싸움을 갚으려고, 몸소 7천 군사를 이끌고 한수를 건넜다.
청목령 아래에 이르렀을 때, 큰 눈이 쏟아졌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았다.
왕은 군사를 돌려 한산성으로 돌아와, 지친 군사들을 위로했다.
395년 겨울. 북쪽의 왕과 남쪽의 왕은, 같은 눈을 맞고 있었다.
관미성을 되찾겠다는 아신왕의 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듬해 396년,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