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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평양으로
제23화

평양으로

장수왕 · 4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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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400년 서쪽의 후연이 쳐들어와 고구려 사람 5천여 집을 끌고 갔지만, 광개토대왕은 요동성과 목저성을 지켜 내고 410년에는 동부여까지 엎드리게 했다. 요동성 앞에서 교만을 부리다 물러간 후연의 왕을 두고, 태왕은 어린 아들 거련에게 ‘왕이 교만하면, 그 값은 군사들이 치른다’고 일렀다(22화의 상상 장면). 412년 서른아홉의 태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이은 장수왕(거련)은, 414년 아버지의 무덤 곁에 거대한 비석을 세웠다.

등장인물

장수왕광개토대왕의 맏아들.
79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다
풍홍북연의 마지막 왕.
북위에 쫓겨 고구려로 온다
돌이국내성 석공의 아들.
상상 인물
신라 매금신라의 왕. 고구려는
‘동이 매금’이라 불렀다
나운장수왕의 손자.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다

427년,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 왕이 된 지 열다섯 해째, 서른넷의 장수왕이 신하들 앞에 섰다.

장수왕도읍을
평양으로 옮긴다.
늙은 신하4백 년 도읍을
버리시렵니까!
장수왕국내성은
골짜기가 좁다.
평양은 들이 넓고,
강이 바다로 열려 있다.
…그리고 이곳엔,
뿌리 깊은 집안이 너무 많다.

도읍을 옮긴 까닭을, 『삼국사기』는 적어 두지 않았다.

떠나는 날 아침, 태왕의 비석이 선 들판에도 짐을 진 사람들이 지나갔다.

돌이아버지가 새긴 글자를…
두고 가요?
아버지돌은 못 가져가도,
새기는 손은 가져간다.
돌이석공의 아들 · 상상 인물아버지이 비석을 새긴 석공 · 상상 인물

427년, 고구려는 오랜 도읍 국내성을 떠났다.

왕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삼국사기』는 이 일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移都平壤)’는 한 줄로만 적었다.

고구려북연북위(도읍 평성은 더 서쪽)백제신라송 ↓(바다 건너 남쪽)서해동해압록강요하대동강용성한성금성국내성오랜 도읍평양427년 새 도읍나라의 경계는 그리지 않았고,도읍의 자리는 대강이다

대동강 가의 평양. 강은 서쪽 바다로 이어지고, 강가에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었다.

장수왕이곳이 고구려의
새 도읍이다!
돌이강이 바다만큼
넓어요!

평양에 새 도읍을 짓는 일이 시작되었다.

평소에는 들판의 성에, 난리 때는 뒷산의 산성에 — 학자들은 이 무렵의 평양을 이렇게 본다.

아버지주춧돌이 반듯해야
집이 백 년을 간다.
돌이저도 쪼아
볼래요!

그 무렵 북쪽 중국에서는 선비족의 나라 북위가 이웃 나라들을 하나씩 아우르고 있었다.

435년, 장수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자, 북위도 사신을 보내 장수왕에게 벼슬 이름을 내렸다.

북위가 거듭 쳐들어오자,
고구려 서쪽의 북연은 날로 위태로워졌다.

그해, 북연의 왕 풍홍이 보낸 사신이 몰래 평양에 왔다.

양이북연의 사신
양이우리 왕의
말씀이옵니다.
‘일이 급해지면 동쪽 고구려에 몸을 맡기겠다’ 하시며,
맞아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장수왕북연이 무너지면,
북위와 바로 맞닿는다.

436년 4월, 북위가 북연의 백랑성을 빼앗았다. 장수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에게 군사 수만을 주어 북연의 도읍 용성으로 보냈다.

맹광고구려의 장수
갈로해진 옷은
벗어 던져라!

고구려 군사들은 북연 무기고의 좋은 무기를 꺼내 들고, 성안을 크게 약탈했다.

436년 5월, 풍홍은 용성의 백성을 이끌고 동쪽 고구려로 떠나며 궁궐에 불을 질렀다.

풍홍북연의 왕
풍홍궁궐을 태워라.
북위에는
재만 남겨 주어라.

불은 열흘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가운데에 두고, 양이의 날랜 군사가 바깥을, 갈로와 맹광의 기병이 뒤를 지켰다.

수레를 나란히 하고 나아간 행렬은, 앞뒤로 80여 리에 이르렀다.

북위의 황제는 사신 봉발을 고구려에 보내, 북연의 왕을 내놓으라 했다.

봉발북위의 사신
봉발황제께서 명하셨소.
연왕을 북위로 보내시오!
장수왕고구려는 마땅히 풍홍과 함께,
황제의 교화를 받들겠소.

풍홍을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북위의 황제는 노하여 고구려를 치려 했으나, 신하들이 말려 그만두었다.

고구려 땅 요동에 닿은 풍홍에게,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이렇게 위로했다.

고구려 사신용성왕 풍군께서 들판에 머무시니,
군사와 말이 고단하시겠소.
풍홍용성왕…?
감히 짐을!

‘용성왕 풍군’은 한 나라의 임금으로 행세하던 풍홍을 ‘용성 고을의 왕, 풍 공’쯤으로 낮춰 부른 말이었다.

평곽을 거쳐 북풍으로 옮겨진 풍홍은, 늘 고구려를 업신여겼다.

풍홍짐의 말이
곧 법이다!

그는 제 나라에 있을 때처럼 벌을 주고 상을 내렸다.

장수왕은 풍홍의 시종들을 빼앗고, 그의 태자 왕인을 볼모로 데려갔다.

왕인풍홍의 태자
풍홍짐의 태자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풍홍은 바다 건너 남쪽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기를 맞아 가 달라고 청했다.

송은 사신 왕백구 등을 보내 풍홍을 맞아 오게 하고, 고구려에도 풍홍을 보내 달라고 했다.

장수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왕이 교만하면,
그 값은 군사들이 치른다.
장수왕…손수와 고구를
북풍으로 보내라.
풍홍용성왕…? 감히 짐을!
손수와 고구장수왕이 보낸 장수들

438년 봄, 손수와 고구는 북풍에서 풍홍과 그 자손 10여 명을 죽였다.

풍홍을 맞으러 온 송의 왕백구는 거느린 7천여 명으로 손수와 고구를 덮쳐,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장수왕은 왕백구를 붙잡아 송으로 보냈다.

송의 황제는 먼 나라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왕백구를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 풀어 주었다.

450년 가을 7월, 동해 바닷가 실직(지금의 삼척)의 들.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사냥을 하고 있었다.

신라 군사고구려 장수다!
덮쳐라!
매복이다…!

신라 하슬라(지금의 강릉)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그를 덮쳐 죽였다.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크게 노하여, 신라 왕에게 사신을 보내 따졌다.

과인은 대왕과 더없이 기쁘게 사이좋게 지냈거늘,
이제 군사를 내어 우리 변방 장수를 죽이니
이것이 무슨 도리요?

孤與大王 修好至歡也 今出兵殺我邊將 是何義耶 —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 마립간신라의 왕(매금)
눌지 마립간변경에서 일어난 일은…
과인의 허물이오.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치자, 눌지 마립간은 몸을 낮춘 말로 사과했다. 고구려군은 돌아갔다.

고구려백제신라서해동해평양한성금성하슬라(강릉)실직(삼척)450년충주 고구려비나라의 경계는 해마다 달라져그리지 않았다

실직은 지금의 삼척, 하슬라는 강릉이다. 남한강 가 충주에는 고구려의 비석이 남아 있다.

남한강 가, 지금의 충주. 고구려는 이곳에 돌비석 하나를 세웠다.

언제 세웠는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돌이어른이 된 석공 (상상 인물)
돌이아버지는 태왕의 비석을 새기셨지.
…이번엔 내 차례다.
五五月月中中高高高麗麗麗太太太王王王新新新羅羅羅寐寐寐錦錦錦世世世世爲爲願願如如如兄兄兄如如如弟弟弟上上下下相相和和守守天天東東東夷夷夷寐寐寐錦錦錦之之衣衣衣服服服
고구려 관리고려 태왕과 신라 매금이,
대대로 형처럼, 아우처럼…
동이 매금에게
옷을 내린다.

비석은 신라 왕을 ‘동이 매금’이라고도 불렀다. 동쪽 오랑캐의 왕이라는 뜻이다.

비문에 따르면, 고구려는 신라 매금과 그 신하들에게 옷을 내렸다.

신라 매금신라의 왕
…동이(東夷)라.

468년, 고구려는 말갈 군사 1만을 앞세워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았다.

475년 9월, 여든둘의 장수왕은 몸소 3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도읍 한성을 빼앗았다.

484년, 북위의 도읍 평성. 북위 사람들은 고구려가 바야흐로 강하다고 여겨,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에서 남제 사신 다음 자리에 고구려 사신을 두었다.

북위 관리첫째 자리는 남제의 사신,
둘째 자리는 고구려의 사신이오.
고구려가 바야흐로
강하다더니…
고구려의 사신둘째 자리

아들 조다를 먼저 보낸 장수왕은, 손자 나운을 궁궐에서 길러 태손으로 삼았다.

나운장수왕의 손자 · 태손
장수왕내 아버지께서
그러셨다.
왕이 교만하면,
그 값은 군사들이 치른다.
나운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님.

491년 겨울 12월, 장수왕이 세상을 떠났다. 아흔여덟 살이었다.

장수왕이곳이 고구려의 새 도읍이다!

그에게는 ‘장수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북위의 효문제는 소식을 듣고, 흰 관과 베옷을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슬퍼했다.

효문제북위의 황제

북위는 장수왕에게 높은 벼슬을 더하고, ‘강(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열 살에 이 강가에 닿았던 석공의 아들도,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손주할아버지,
강이 바다만큼 넓어요!
열 살의 돌이강이 바다만큼 넓어요!
돌이…그렇지.
바다만큼 넓구나.

손자 나운이 왕위를 이었다. 그가 문자명왕이다.

장수왕이 옮긴 도읍 평양은,
그 뒤 240여 년 동안 고구려의 도읍이었다.

제23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국내성 성벽 모서리국내성 성벽 모서리 · 중국 지린성 지안

    427년, 평양으로

    『삼국사기』는 장수왕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고만 적었어요. 까닭은 적혀 있지 않아서, 국내성에 뿌리내린 귀족들의 힘을 누르고 왕의 힘을 키우려 했다는 견해, 넓은 들과 바닷길이 있는 곳에서 나라를 키우려 했다는 견해, 남쪽의 백제·신라로 나아가려 했다는 견해 등이 있어요. 평양은 그 전부터 고구려의 큰 성이었어요(371년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싸우다 세상을 떠났고, 393년에는 평양에 절 아홉 곳을 세웠어요). 이 화에서 왕이 밝히는 까닭과 신하의 반대는 이런 견해들을 바탕으로 지어낸 말이에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 새 도읍은 어디였을까

    427년의 도읍은 대동강 북쪽, 지금의 평양 대성구역 일대로 봐요. 평소에는 들판의 성에 머물고, 난리가 나면 뒷산의 대성산성으로 들어가는 짜임이었다는 견해가 많아요. 들판의 왕궁으로는 대성산 남쪽 기슭의 큰 궁터 안학궁(한 변 622m)을 꼽아 왔지만, 나온 기와와 궁터 밑에서 드러난 5~6세기 무덤 때문에 6세기 이후(고려 때라는 견해도 있어요)의 것으로 보기도 해서, 요즘은 가까운 청암동 토성을 427년의 왕성으로 보는 학자가 많아요. 586년 평원왕은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 지금의 평양 시내 쪽에 쌓은 장안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고, 이곳이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이 되었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평양 일대의 발굴
  3. 북위 효문제의 예불 행렬 부조북위 효문제와 신하들의 예불 행렬 · 룽먼 석굴 부조(6세기)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북위와 남조 사이에서

    장수왕은 왕위에 오르자 곧(413) 바다 건너 동진에 사신을 보내 붉고 흰 털의 말을 바쳤고, 그 뒤로도 남쪽의 송·남제와 북쪽의 북위 양쪽에 사신을 보냈어요. 466년 북위가 왕의 딸을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라 하자, 딸은 이미 시집갔다며 아우의 딸을 보내겠다고 했다가, ‘북위가 혼인한 북연을 뒤에 쳤다’는 말을 듣고는 그 아이가 죽었다고 둘러댔어요. 480년에는 남제로 가던 고구려 사신이 바다에서 북위 사람들에게 붙잡혀, 북위 효문제가 ‘임금을 죽이고 자리를 훔친 자와 통하느냐’고 꾸짖은 일도 있었어요. 그래도 484년 북위는 고구려 사신을 남제 사신 다음 자리에 두었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4. 차오양 북탑중국 랴오닝성 차오양 북탑 · 북연의 도읍 용성이 있던 곳

    망한 나라의 왕, 풍홍

    북연은 407년 후연이 무너진 뒤 고운이 세운 나라로(22화), 409년부터는 풍씨 집안이 다스렸어요. 풍홍은 그 마지막 왕이에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436년 고구려 군사는 용성에 들어가 북연 무기고의 무기를 꺼내 쓰고 성안을 약탈했으며, 풍홍은 궁궐을 불태우고 고구려로 왔어요. 고구려를 업신여기던 풍홍이 송에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청하자, 장수왕은 438년 그와 자손 10여 명을 죽이게 했어요. 망명한 왕을 받아들이고도, 끝내 북위에도 송에도 넘겨주지 않은 셈이에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5. 충주 고구려비충주 고구려비 (국보) · 2006년, 비각 안에 서 있던 모습

    충주 고구려비

    1979년 충북 충주(당시 중원군) 입석마을의 돌기둥이 고구려의 비석으로 밝혀졌어요. 높이 2m 남짓한 네모진 돌기둥의 네 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지만 닳은 글자가 많아, 읽는 글자도 학자마다 조금씩 달라요. 읽히는 글자 가운데 ‘高麗太王’ ‘新羅寐錦’ ‘如兄如弟(형처럼 아우처럼)’ ‘東夷寐錦’ ‘衣服’, 그리고 신라 땅 안에 머문 고구려 지휘관 ‘新羅土內幢主’가 있어요. 세운 때는 여러 설이 있는데 장수왕 때로 보는 견해가 많고, 2019년에는 ‘영락 7년(397)’으로 읽히는 글자가 있다는 발표도 나왔어요. 비석은 두 나라가 대대로 ‘형처럼 아우처럼’ 지내기를 바란다고 적었지만, 5세기 중엽부터 두 나라는 자주 부딪쳤어요(450년 실직의 일, 468년 실직주성). 450년의 일은 기록이 달라요. 신라본기는 고구려군이 서쪽 변경을 쳤다가 사과를 받고 돌아갔다고, 고구려본기는 군사를 내려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사과하자 그만두었다고 적었어요.

    충주 고구려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
  6. 장군총 (중국 지안)장군총 · 중국 지린성 지안

    아흔여덟 해, 그리고 무덤

    『삼국사기』는 장수왕이 79년 동안 다스리고 491년 12월 9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북위 효문제가 흰 관과 베옷을 입고 동쪽 교외에서 슬퍼했다고 적었어요. 아들 조다가 일찍 죽어, 궁궐에서 길러진 손자 나운(문자명왕)이 뒤를 이었어요. 무덤은 지안의 장군총(한 변 30m 남짓, 높이 13m의 7층 돌무지무덤)으로 보는 견해, 평양의 전동명왕릉이나 경신리 1호분(전 한왕묘)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요.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보기도 해요(22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 문자명왕
  7. 상상으로 그린 장면

    석공 돌이와 그 아버지, 손주는 상상 인물이에요. 천도를 두고 오간 말과 왕이 밝히는 까닭, 장수왕의 혼잣말, 풍홍이 외치는 말들, 눌지 마립간과 신라 매금의 말, 북위 관리들의 말, 손자와 나눈 이야기는 기록을 바탕으로 지어냈어요. 광개토대왕이 거련에게 했다는 ‘왕이 교만하면…’이라는 말(22화)도 지어낸 말이에요. 양이가 전한 풍홍의 말, 갈로와 봉발의 말, ‘용성왕 풍군’ 인사, 북위에 보낸 답, 장수왕이 신라에 따진 말은 『삼국사기』를 풀어 쓴 것이에요. 궁궐·산성·무기고·행렬의 모습, 북위 사람들의 차림, 옷을 내리는 장면, 비석을 새기는 장면과 글자의 배열은 짐작으로 그렸어요.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제24화 · 바둑 두는 스님 도림

바둑을 좋아하는 백제의 개로왕 앞에,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달아나 왔다는 스님 도림이 나타난다. 바둑판 위의 한 수 한 수가, 475년 백제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데….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