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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한강을 차지한 왕
제30화

한강을 차지한 왕

신라 진흥왕 · 540년 ~ 5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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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지난 화에서는 신라의 법흥왕을 만났다. 율령을 반포한 왕이 절을 세우려 하자 귀족들이 반대했고, 젊은 신하 이차돈이 목숨을 바쳐 불교의 길을 열었다고 전한다. 532년에는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항복해 왔다. 540년 법흥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는 조카이자 외손자인 삼맥종이 이었다.

등장인물

진흥왕신라의 왕 · 이름은 삼맥종
일곱 살에 왕이 되었다
이사부신라의 장수
우산국을 항복받았다
거칠부신라의 귀족
젊어서 스님이었다
혜량고구려의 이름난 법사
우륵가야에서 온 악사
열두 줄 가야금
김무력신주의 군주
김유신의 할아버지

1816년 7월, 조선의 도읍 한양 북쪽, 북한산의 봉우리 비봉.

김경연무학대사의 비라고들 하고,
글자 없는 비라고도 하지요.
김정희조선의 젊은 학자
김정희…아닐세. 이끼 밑에
글자가 있어!
眞興太王
김정희진… 흥… 태왕…!

1,200여 년 전, 신라의 한 왕이 이 산꼭대기에 세운 비석이었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 끝, 서라벌에 도읍한 나라였다.

그 나라의 왕이 어떻게 이 먼 한강 가의 산꼭대기에 비석을 세웠을까.

이야기는 540년, 서라벌에서 시작된다.

540년 가을, 법흥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 조카이자 외손자인 일곱 살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일곱 살 왕 · 이름은 삼맥종왕태후왕의 어머니 · 법흥왕의 딸

왕이 아직 어려, 어머니인 왕태후가 대신 나라를 다스렸다.

어린 왕어머니… 이 관이
너무 무거워요.
왕태후임금은 무거운 것을
견뎌야 한단다.
어린 왕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안팎의 군사를 맡기노라!
이사부우산국을 항복받은 장수
이사부목숨을 다해
받들겠나이다.

541년 봄 3월, 서라벌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545년 7월,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아뢰었다.

이사부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적어,
만대에 보이는 것이옵니다.
지금 엮어 두지 않으면,
뒷사람들이 무엇을 보겠사옵니까?
왕옳은 말이다.
왕거칠부, 그대가 선비들을 모아
나라의 역사를 엮으라.
거칠부대아찬 · 내물왕의 5대손
…그대가,
스님이었다고?

거칠부는 젊은 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사방을 떠돌던 사람이었다.

젊은 날의 거칠부는 고구려를 엿보려고, 스님의 모습으로 그 땅에 들어갔다. 마침 이름난 법사 혜량이 경을 풀이하고 있었다.

혜량고구려의 이름난 법사
혜량너는 어디서 왔느냐?
거칠부…신라 사람입니다.
혜량사람을 많이 보아 왔지만,
너는 예사 사람이 아니로구나.
거칠부저는 그저 스님께
배우러 왔을 뿐입니다.
이 나라에도 사람 볼 줄 아는 이가 있다.
붙잡히기 전에, 어서 돌아가거라.
혜량제비 턱에 매의 눈이라…
너는 장차 장수가 될 게다.
군사를 이끌고 오거든,
나를 해치지 말아라.
거칠부말씀대로 된다면, 스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합니다!

거칠부는 그 길로 신라에 돌아와 벼슬길에 올랐고, 왕의 명을 받아 『국사』를 엮었다.

548년, 고구려가 예와 함께 백제의 독산성을 치자, 왕은 장군 주진에게 날랜 군사 3천을 주어 백제를 구하게 했다.

백제와 신라는 백 년 넘게 고구려에 맞서 손잡아 온 사이였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성을 하나씩 빼앗았다. 백제는 도살성을, 고구려는 금현성을.

열일곱 살 왕두 나라 군사가 모두 지쳤다.
지금 두 성을 거두라!
이사부명을 받들겠나이다!

이사부는 두 성을 빼앗아 성벽을 더 쌓고, 갑옷 입은 군사 1천을 두어 지키게 했다.

그 무렵, 신라군은 죽령을 넘어 남한강 가의 적성(지금의 충북 단양)을 차지했다.

이사부적성 사람 야이차는 마음을 다했다.
그 공에 상을 내리노라!
무력함께 싸운 장수

이 명을 새긴 돌에는, 이사부와 무력 같은 장수들의 이름도 새겨졌다.

진흥왕올해부터 해를
‘개국’으로 센다!
나라를 새로 연다는 뜻이다!

551년 정월, 열여덟 살이 된 왕은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551년 3월, 왕은 순행 길에 낭성에 머물다가, 가야에서 온 악사 우륵과 제자 니문이 음악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불렀다.

니문우륵의 제자
진흥왕줄이 열둘이로구나.
우륵가실왕께서 열두 달을 본떠
만드신 가야의 악기이옵니다.

우륵은 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안고 신라로 온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저마다 새 노래를 지어 왕 앞에서 탔다.

그해 왕은 거칠부와 구진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게 했다.

거칠부한강으로!

백제가 먼저 한강 하류를 깨뜨리자, 거칠부 등은 그 기세를 타 죽령 너머 고현 안쪽의 열 군을 차지했다.

그때, 늙은 스님 하나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길가에 나와 서 있었다. 혜량이었다.

거칠부그날 스님 덕에 살았습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지요.
혜량우리나라는 어지러워
망할 날이 머지않았소.
그대의 나라로 데려가 주시오.
혜량군사를 이끌고 오거든, 나를 해치지 말아라.

거칠부는 혜량과 한 수레를 타고 돌아왔다. 왕은 혜량을 나라의 스님들을 이끄는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열었다.

553년, 서라벌. 한강 하류는 백제가, 상류는 신라가 차지한 지 두 해째였다.

신하백제와의 맹약을
저버리시렵니까?
진흥왕강 어귀에서 배를 띄우면
바다 건너 중국에 닿는다.
…한강을, 모두 얻어야 한다.

553년 7월,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 변경, 한강 하류의 땅을 빼앗아 그곳에 ‘신주’를 두었다.

김무력신주의 군주 · 금관국 마지막 왕의 막내아들
김무력강 어귀까지,
모두 신라 땅이다!
고구려백제신라서해동해한강죽령서라벌사비551년 · 신라죽령 너머 한강 상류 열 군551년 · 백제되찾은 한강 하류553년 · 신주신라가 백제에게서 빼앗았다바닷길 → 중국나라의 경계와 위치는 대략이며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두 해 전 함께 싸운 백제에게서 빼앗은 땅이었다.

553년 10월, 왕은 백제 왕의 딸을 ‘작은 왕비(소비)’로 맞았다.

백제의 왕녀성왕의 딸 ·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석 달 전 백제의 한강 땅을 빼앗은 왕이었다. 이 혼인의 까닭은,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554년 7월, 백제의 왕 명농(성왕)이 가야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을 쳐 왔다.

관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은 밀렸다.

소식을 들은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신주의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달려왔다.

도도삼년산군의 고간 · 김무력의 비장
김무력서둘러라!

그 밤, 백제의 왕은 보병과 기병 쉰 명만 거느리고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기록은, 김무력의 비장 도도가 백제 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고 적었다.

신라의 기록은 이 싸움에서 백제의 좌평 넷과 군사 2만 9,600명을 베었다고 적었다.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했다.

匹馬無反者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승리의 소식이 서라벌에 닿았다. 서라벌 궁궐에는, 아홉 달 전 백제에서 시집온 작은 왕비가 있었다.

왕태후임금은 무거운 것을
견뎌야 한단다.

그날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555년 10월, 왕은 몸소 북한산까지 순행해 새로 얻은 땅의 경계를 정했다.

진흥왕저 강이 바다에
닿는 곳까지—
이제 신라의 땅이다.

11월에 돌아와서는 지나온 고을들의 한 해 세금을 면해 주고, 두 가지 죄를 뺀 죄인들을 모두 용서했다.

그 뒤 이 봉우리에, 왕이 이 땅을 돌아본 일을 새긴 비석이 섰다.

왕이 넓힌 땅의 끝마다, 비석이 섰다.

고구려백제신라서해동해서라벌적성비단양 · 545~550 무렵북한산비한강 · 555년 이후창녕비가야 땅 가까이 · 561년황초령비동북쪽 고개 · 568년마운령비동북쪽 바닷가 · 568년대가야 (562)나라의 경계와 위치는 대략이며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562년에는 이사부가 열대여섯 살의 화랑 사다함과 함께 대가야를 무너뜨렸다.

568년, 왕은 동북쪽 멀리 황초령과 마운령에도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서 왕은 스스로를 ‘짐’이라 부르며, 이렇게 적었다.

사방으로 경계를 넓혀 백성과 땅을 널리 얻으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의 사신이 오갔다.

四方託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 마운령비·황초령비 (568)

572년 봄, 태자 동륜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왕은 싸움터에서 죽은 군사들을 위해 바깥 절에서 이레 동안 팔관회를 열었다.

아이엄마, 아빠도
저 불빛을 볼까요?

576년 봄, 왕은 빼어난 젊은이들을 뽑아 곱게 꾸미게 하고, ‘화랑’이라 부르며 받들게 했다.

화랑산과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화랑과 그 무리는 서로 도리를 닦고 노래와 음악을 즐기며, 이름난 산과 강을 찾아다녔다.

말년의 왕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스스로를 ‘법운’이라 불렀다.

어린 왕어머니… 이 관이 너무 무거워요.

576년 가을 8월, 진흥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오른 지 서른일곱 해째였다.

1817년 6월, 김정희는 조인영과 함께 다시 이 봉우리에 올라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판독했다.

진흥왕저 강이 바다에 닿는 곳까지—

이끼 속에 잊혀 있던 왕의 이름이, 그렇게 다시 세상에 나왔다.

한강을 얻은 신라는 이제 서해를 건너, 중국에 잇달아 사신을 보냈다.

한반도 동남쪽 끝의 작은 나라가,
이제 세 나라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제30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경주 월성과 해자경주 월성 · 신라 궁궐이 있던 곳

    일곱 살일까, 열다섯 살일까

    『삼국사기』는 진흥왕이 일곱 살에 왕위에 올라 왕태후가 대신 나라를 다스렸다고 적었지만, 『삼국유사』는 열다섯 살에 왕이 되었다고 적었어요. 아버지는 법흥왕의 아우 입종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라,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면서 외손자예요. 551년 연호를 ‘개국’으로 고친 것을 두고, 이 무렵부터 왕이 몸소 나라를 다스렸다고 보는 견해가 많아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
  2. 『삼국사기』 옛 판본『삼국사기』 옛 판본

    거칠부와 혜량, 그리고 『국사』

    545년 이사부가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적어 만대에 보이는 것’이라며 역사책을 엮자고 하자, 왕은 거칠부에게 선비들을 모아 『국사』를 엮게 했어요. 이 책은 지금 전하지 않아요.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은 그가 젊어서 스님이 되어 고구려를 엿보러 갔다가 혜량법사 덕에 무사히 돌아왔고, 551년 고구려 땅에서 혜량을 다시 만나 신라로 모셔 왔다고 전해요. 왕은 혜량을 승통으로 삼고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처음 열었어요. 거칠부는 576년 진지왕 때 상대등이 되었고, 일흔여덟에 세상을 떠났어요.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 단양 신라 적성비단양 신라 적성비 (국보)

    단양 신라 적성비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조사단이 충북 단양의 적성 산성 안에서 찾아낸 비석이에요(국보). 윗부분이 깨져 나갔지만 280여 자가 남아 읽혀요. 왕이 이사부를 비롯한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신라가 적성을 차지할 때 마음을 다한 그 고장 사람 야이차에게 상을 주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같은 상을 내리겠다고 밝힌 내용이에요. 새겨진 장수들의 벼슬을 견주어 545~550년 무렵에 세운 것으로 보며, 신라가 이미 죽령을 넘어 남한강 상류로 나아갔음을 보여 줘요. 비에는 뒷날 신주의 군주가 되는 무력의 이름도 있어요.

    단양 신라 적성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551년의 열 군, 553년의 신주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은 551년 백제가 먼저 ‘평양’을 깨뜨리자 거칠부와 여덟 장군이 죽령 바깥, 고현 안쪽의 열 군을 차지했다고 적었어요. 이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이 아니라 한강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 고구려본기에도 그해 돌궐이 요동의 신성을 에워쌌고 ‘신라가 쳐들어와 열 군을 빼앗았다’고 나와요. 553년 7월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두었고, 564년에는 북제에, 566년부터는 진에 잇달아 사신을 보냈어요.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자는 청을 거절하고 이를 고구려에 알렸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어요.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 고구려본기 양원왕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
  5. 관산성 — 신라 쪽의 기록

    신라본기는 554년 7월 백제 왕 명농이 가량(가야)과 함께 관산성을 치자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섰다가 밀렸고, 신주 군주 김무력이 달려와 그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백제 왕을 죽였다고 적었어요. 이어 좌평 넷과 군사 2만 9,600명을 베어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지요. 백제본기는 왕이 보병과 기병 쉰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가 복병을 만나 죽었다고만 적었어요. 관산성은 지금의 충북 옥천, 도도의 고향 삼년산군은 지금의 충북 보은으로 봐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6.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 국립중앙박물관

    진흥왕 순수비와 김정희

    왕은 넓힌 땅을 몸소 돌아보며(순수) 비석을 세웠어요. 568년의 황초령비·마운령비와 북한산 비봉의 북한산비가 순수비이고, 561년의 창녕 척경비도 함께 ‘진흥왕의 네 비’로 꼽혀요. 북한산비는 오랫동안 ‘무학대사의 비’, 또는 이끼에 덮여 ‘글자 없는 비’로 불렸는데, 1816년 7월 김정희가 김경연과 함께 올라 진흥왕의 비임을 알아보고 이듬해 6월 조인영과 다시 와서 68자를 판독했어요. 세운 해는 555년 순행 때라는 견해와 568년 무렵이나 그 뒤라는 견해가 있는데, 지금은 뒤의 견해가 더 널리 받아들여져요. 1972년 산에서 옮겨 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요(국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중앙박물관
  7. 『삼국유사』『삼국유사』

    화랑의 시작, 그리고 이 화의 상상

    『삼국사기』는 576년 봄 처음 두 여인을 ‘원화’로 받들었으나 남모와 준정이 서로 시기하다 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생겨 무리가 흩어졌고, 그 뒤 남자들을 곱게 꾸며 ‘화랑’으로 받들었다고 적었어요. 그런데 562년 대가야를 칠 때 이미 화랑이던 사다함의 이야기도 있어서, 원화가 화랑으로 바뀐 것은 실제로는 562년보다 앞선 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삼국유사』는 설원랑을 첫 국선으로 받든 이야기를 따로 전해요. 이 화에서 1816년 두 선비가 나눈 말, 어린 왕과 어머니의 말, 553년 궁궐의 의논, 554년 밤 왕과 작은 왕비의 모습, 팔관회의 엄마와 아이는 상상으로 그린 것이고, 거칠부와 혜량의 말은 열전을 풀어 쓴 거예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삼국유사』 탑상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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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 세속오계

열대여섯 살의 화랑 사다함은 대가야로 가는 싸움터에 보내 달라고 왕에게 거듭 청한다. 그리고 수십 년 뒤, 두 젊은이가 스님 원광 앞에 무릎을 꿇고 평생 지킬 가르침을 묻는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