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제31화세속오계
제31화

세속오계

화랑과 신라의 젊은이들 · 562년 · 600~602년
아래로 스크롤 ↓
🎧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지난 화에서는 일곱 살에 왕이 된 신라의 진흥왕을 만났다. 왕은 백제와 손잡고 한강으로 나아갔다가 553년 백제의 한강 하류마저 빼앗았고, 이듬해 관산성 싸움에서 백제의 성왕이 목숨을 잃었다. 왕은 넓힌 땅의 끝마다 비석을 세웠고, 576년 봄에는 빼어난 젊은이들을 뽑아 화랑으로 받들게 했다.

등장인물

사다함열대여섯 살의 화랑
내물왕의 7대손
무관랑사다함의 벗
죽음을 함께하기로 했다
원광수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온 스님
귀산사량부의 젊은이
무은의 아들
추항귀산의 벗
무은귀산의 아버지
신라의 장군

언제인지 모를 어느 임신년 6월 16일, 신라의 두 젊은이가 돌에 맹세를 새겼다.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
하늘 앞에… 맹세한다.

돌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충성의 길을 굳게 지켜,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天前誓 … 忠道執持 過失无誓 — 임신서기석

이 이야기는, 그런 맹세를 품었던 신라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562년 가을 9월, 가야가 신라에 맞서 일어났다. 진흥왕은 이찬 이사부에게 가라(대가야)를 치게 했다.

진흥왕신라의 왕이사부이찬 · 우산국을 항복받은 장수
진흥왕가라를 쳐서
평정하라!
이사부명을 받들겠나이다!

그 무렵 서라벌에는 열대여섯 살의 화랑, 사다함이 있었다.

사다함화랑 · 열대여섯 살
사다함가라와 싸움이 났다고…?
나도 가겠다!

내물왕의 7대손. 사람들이 청하자 마지못해 화랑이 되었는데, 따르는 무리가 1천 명에 이르렀고 모두 그를 진심으로 따랐다.

사다함저도 싸움터에
보내 주십시오!

하지만 왕은, 사다함이 아직 어리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사다함은 물러서지 않고 거듭, 굳게 청했다.

진흥왕그 뜻이 참으로 굳구나.
너를 귀당의
비장으로 삼겠다!

왕은 마침내 그를 ‘귀당’이라는 부대의 비장(장수를 돕는 장수)으로 삼았다. 사다함을 따르던 무리도 많이 함께 나섰다.

사다함에게는 일찍이 ‘죽음을 함께하는 벗’이 되기로 약속한 벗, 무관랑이 있었다.

무관랑사다함의 벗
무관랑잊지 마.
우리는 죽음도 함께하는 벗이야.
사다함잊을 리가 있나.

가라의 경계에 이르자, 사다함은 원수 이사부에게 자기 군사를 이끌고 먼저 들어가겠다고 청했다.

사다함제 군사를 이끌고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이사부…좋다. 가거라!

사다함은 기병 5천을 이끌고 앞서 달려, 가라의 성문으로 뛰어들었다.

사다함나를 따르라!

가라 사람들은 문을 ‘량’이라 했다. 이 성문의 이름은 전단량, 곧 전단문이었다.

사다함은 흰 깃발을 세웠다. 뜻밖에 들이닥친 군사에, 성안 사람들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뒤이어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성안 사람들은 한꺼번에 항복했다.

왕은 공을 따졌다. 사다함의 공이 으뜸이었다.

진흥왕좋은 밭과 가라 사람 300을
상으로 내리노라!
사다함…받을 수 없사옵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했지만, 왕은 굳이 받게 했다.

사다함은 상으로 받은 가라 사람 300명을 모두 풀어 주어, 자유로운 백성(양인)이 되게 했다.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다.

사다함이제 그대들은
자유로운 백성이오.

받은 밭은 함께 싸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송했다.

그 뒤, 무관랑이 병으로 앓아누웠다.

무관랑먼저 가게 돼서…
미안해.
사다함그런 말 하지 마…

무관랑이 세상을 떠나자, 사다함은 몹시 슬피 울었다.

무관랑우리는 죽음도 함께하는 벗이야.

그리고 이레 뒤, 사다함도 세상을 떠났다. 열일곱 살이었다.

받은 것을 모두 놓아준 소년은, 벗을 잃은 슬픔만은 끝내 놓지 못했다.

그로부터 마흔 해 가까이 흘렀다.

진흥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의 손자 진평왕이 신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600년, 바다 건너 수나라에서
스님 한 사람이 돌아왔다.

원광은 바다 건너 중국의 진나라와 수나라에서 오랫동안 불법을 배운 스님이었다.

600년, 원광은 수나라에 갔던 신라 사신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원광수나라에서 돌아온 스님
귀산선비들과 어울리려면,
먼저 마음을 닦아야 하지 않겠나?
추항그렇지 않으면
욕을 당하기 쉽지.
귀산어진 분 곁에서
도를 들어 보세!
귀산무은의 아들추항귀산의 벗

서라벌 사량부의 귀산은 어려서부터 같은 부의 추항과 벗이었다.

그 무렵 원광은 운문산 가슬갑사에 머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원광을 찾아가, 옷자락을 걷어 잡고 나아가 아뢰었다.

귀산저희는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습니다.
평생 새길 가르침을,
한 말씀 내려 주십시오.
원광부처님의 계에는 보살계가 있어,
열 가지로 나뉜다.
허나 너희는 신하요 자식이니,
감당하기 어려울 게다.
이제, 세속의
다섯 가지 계가 있다.
첫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둘째,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셋째,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않고,
다섯째,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너희는 이를 행하되,
소홀히 하지 말라!

若等 行之無忽 — 『삼국사기』 열전 귀산

귀산다른 것은 알겠사오나,
‘살생유택’만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원광봄·여름과 한 달의 여섯 재일에는
죽이지 않는다.
그것이 때를 가림이다.
원광일 부리는 말·소·닭·개는 죽이지 않는다.
고기가 한 점도 안 되는 작은 것도
죽이지 않는다.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

그것이 물건을 가리는 것이며, 세속의 좋은 계라고 원광은 말했다.

귀산과 추항이제부터 받들어 행하여,
감히 잃지 않겠습니다!

602년 가을 8월, 백제의 무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의 아막산성을 에워쌌다.

진평왕이 보낸 날랜 기병 수천에 밀려 물러난 백제는, 신라가 국경 가까이에 네 성을 새로 쌓자 다시 쳐들어왔다.

좌평 해수가 이끄는
보병과 기병 4만이었다.

아막성은 백제와 신라가 맞닿은 산줄기 위의 성이었다. 지금의 전북 남원 동쪽이다.

백제신라서해동해남해낙동강금강서라벌사비가슬갑사 (청도)대가야 (고령) · 562년아막성 · 602년지금의 남원 동쪽나라의 경계와 위치는 대략이며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신라는 건품·무은 등 장군들에게 군사를 주어 막게 했다. 귀산과 추항도 소감(낮은 무관 벼슬)이 되어 함께 나섰다.

무은귀산의 아버지 · 신라의 장군
무은아막성으로 간다!
귀산예, 아버님!

싸움에서 밀린 백제군은 천산 서쪽의 큰 못으로 물러나, 군사를 숨겨 두고 기다렸다.

쫓아가 싸우다 지친 신라군이 물러서던 그때, 맨 뒤를 지키던 무은에게 복병이 뛰쳐나와 갈고리로 그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원광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라.
귀산스승님께 들었다!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않는다고!
어찌 달아나겠는가!
무은귀산아…!
귀산아버님,
어서 가십시오!

귀산은 제 말을 아버지에게 내주어 싸움터에서 빠져나가게 했다.

귀산추항, 자네는 물러나게!
추항벗을 두고
어디로 가겠나!

두 사람이 창의 한 가지인 과(戈)를 휘두르며 싸우는 것을 본 신라군이 떨쳐 일어나, 백제군을 크게 무찔렀다.

신라의 기록은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적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귀산과 추항은, 돌아오는 길에 숨을 거두었다.

진평왕은 신하들과 함께 아나의 들까지 나와, 두 사람의 주검 앞에서 슬피 울었다.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죽은 귀산에게 나마, 추항에게 대사의 벼슬을 내렸다.

진평왕진흥왕의 손자 · 신라의 왕
귀산과 추항이제부터 받들어 행하여,
감히 잃지 않겠습니다!
사다함이제 그대들은
자유로운 백성이오.
추항벗을 두고
어디로 가겠나!

어느 임신년 6월 16일, 신라의 두 젊은이는 돌에 맹세를 새겼다.

그 임신년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다함보다 앞선 552년일지도, 귀산과 추항보다 뒤인 612년일지도 모른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제31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삼국사기』 옛 판본『삼국사기』 옛 판본

    사다함, 두 기록이 전하는 소년

    『삼국사기』에는 사다함 이야기가 두 군데 실려 있어요. 신라본기는 562년 9월 ‘가야가 배반하자’ 왕이 이사부에게 치게 하고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았는데, 사다함이 기병 5천을 이끌고 먼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이 두려움에 빠졌고,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한꺼번에 항복했다고 적었어요. 열전은 그가 진골로 내물왕의 7대손이며, 사람들이 청해 마지못해 화랑이 되었고 따르는 무리가 1천 명이었다고 해요. 상으로 받은 밭을 본기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열전은 ‘굳이 사양하다가 알천의 메마른 땅만 청했다’고 적어 조금 달라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열전 사다함
  2. 죽음을 함께하기로 한 벗

    열전은 사다함이 처음에 무관랑과 ‘죽음을 함께하는 벗(死友)’이 되기로 약속했는데,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몹시 슬피 울다가 이레 만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고 적었어요. 그때 사다함은 열일곱 살이었어요. 무관랑에 대해 전하는 것은 이것뿐이라, 이 화에서 두 사람이 언덕에서 나눈 말과 병상의 모습, 무관랑의 생김새는 상상으로 그린 거예요.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
  3. 청도 운문사청도 운문사 · 『삼국유사』는 원광이 머문 가슬갑이 운문사 동쪽에 있었다고 전해요

    원광과 세속오계 — 두 책의 기록

    세속오계는 『삼국사기』 귀산 열전과 『삼국유사』 「원광서학」에 실려 있어요. 『삼국유사』는 귀산 이야기를 옮기면서 셋째 계를 ‘교우유신(交友有信)’으로 적었고, 원광이 머문 절(『삼국사기』의 ‘가실사’)을 ‘가슬갑’이라 부르며 운문사에서 동쪽으로 9천 걸음쯤 떨어진 고개 북쪽 골짜기의 절터라고 덧붙였어요. 정확한 자리는 지금도 알 수 없어요. 또 원광의 성을 박씨라 한 중국의 『속고승전』과 설씨라 한 신라의 옛 전기를 함께 싣고, 어느 쪽이 옳은지 ‘감히 정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원광이 589년 진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구하고 600년에 돌아왔다고 적었어요.

    『삼국사기』 열전 귀산 · 신라본기 진평왕 · 『삼국유사』 의해 「원광서학」
  4. 세속오계는 화랑만의 계율이었을까

    세속오계는 흔히 ‘화랑오계’라고도 불려 화랑이 지킨 계율로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삼국사기』는 귀산과 추항을 화랑이라고 적지 않았고, 두 사람이 ‘선비들과 어울리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야 한다’며 원광을 찾아갔다고만 했어요. 다섯째 ‘살생유택’을 원광은 여섯 재일(한 달에 여섯 번, 몸과 마음을 삼가는 날)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고, 부리는 가축과 고기가 한 점도 안 되는 작은 것은 죽이지 않으며,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뜻으로 풀었어요.

    『삼국사기』 열전 귀산
  5. 임신서기석임신서기석 (보물) · 국립경주박물관

    임신서기석 — 두 젊은이의 맹세

    1934년 무렵 경주 현곡면 금장리의 석장사 터 가까이에서, 길이 30센티미터쯤의 돌에 새긴 74자의 맹세가 발견되었어요.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적는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로 시작해, 충성의 길을 지켜 허물이 없기를,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그 길을 행하기를 맹세하고,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는 『시경』·『상서』·『예기』와 ‘전(傳)’을 3년 동안 차례로 익히기로 맹세했다고 적었어요. 임신년은 552년이나 612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732년으로 보기도 해요),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보물이에요.

    임신서기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602년 아막성 싸움 — 두 나라의 기록

    백제본기 무왕 3년 조는 이 싸움을 더 자세히 전해요. 8월 아막산성(모산성)을 에워쌌다가 진평왕의 기병 수천에 밀려난 무왕은, 신라가 소타·외석·천산·옹잠 네 성을 쌓자 좌평 해수에게 보병과 기병 4만을 주어 다시 쳤지만, 해수는 천산 서쪽 큰 못의 싸움에서 지고 겨우 말 한 필로 돌아갔다고 해요. 귀산 열전은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적었고, 귀산과 추항은 백제본기에서는 그 자리에서, 열전에서는 돌아오는 길에 숨져 조금 달라요. 아막성은 지금의 전북 남원시 아영면에 남은 둘레 640미터쯤의 돌 산성으로 보며, 616년에도 백제가 이 성을 쳤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 열전 귀산 · 신라본기 진평왕
  7. 울주 천전리 각석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 신라 사람들이 다녀가며 글자를 새긴 바위

    화랑과 낭도, 그리고 『화랑세기』

    화랑은 많게는 1천 명에 이르는 무리(낭도)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다니며 도의를 닦고 노래와 음악을 즐겼어요. 『삼국사기』가 인용한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했지만, 이 책은 전하지 않아요(1989년과 1995년에 알려진 필사본은 진짜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어요). 『삼국사기』는 576년 봄 원화를 받들었다가 그 뒤 화랑으로 바꾸었다고 적었지만, 562년에 이미 화랑이던 사다함이 있어서 실제로는 그보다 앞선 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이 화의 돌을 새기는 장면과 원광이 탄 배, 그리고 열전에 실린 귀산의 외침을 뺀 싸움터의 말들도 상상으로 그린 거예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 열전 사다함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제32화 · 철의 왕국

쇠를 실은 배들이 강을 오르내리던 나라, 가야. 가실왕이 만든 열두 줄 악기에 악사 우륵이 노래를 지었지만, 나라는 기울어 간다. 그리고 562년, 흰 깃발이 세워진 그날 — 성 안의 가야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